[평산 신씨자료방]/♣ 평산신씨 의 시조

평산신씨의 시조 장절공

물탕골 2011. 4. 27. 17:19

 

시조 장절공 존영 (始祖 壯節公 尊影)

 

 

 

 

 

 

사 안 도 (射 雁 圖)

  

 

 

  고려 태조가 평주 삼탄으로 사냥을 나갔을 때 낮참에 기러기 세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고 태조가 "누가 저 기러기를 쏘겠는가?" 라고 하자 장절공(壯節公)이 선뜻 나서 태조가 명한 대로 셋째 기러기 왼쪽 날개를 맞혀 떨어뜨리는 장면. 이리하여 장절공은 평산신씨( 平山申氏)로 사적(賜籍)되었다.

 

 

동 상 (銅 像) 

 

 

장절공 신숭겸장군의 동상은 탄생지인  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구룡리에 있는  (1.용산단 경내 )  순절지인 대구 동구 봉무동   (2.파군재 삼거리)  묘소가 있는 강원도 춘천시 서면   (3.방동 경내)  에 모셔져 있다

 

묘 소 (墓所) (예장지)

 

 

 

 

 
평산신씨가 꼭알아야할것
 

 

 

평산신씨,신숭겸(장절공)후손-한성윤공파

 

 ★장절공의 출신지:  고려사에는 춘천, 후에 발간한 신동국여지승람에는 곡성으로 되었음.  고려사는 정사이나 전체를 대략적으로 기술한 것이고 후자는 지역적  으 로 그 특성을 살펴 자세히 기록 전수한 것으로 보아 후자를 학계에서 통설로 인정함.

 

곡성에서 유년 및 청년시절을 보내면서 화장산 비래산 봉두산 일대를 중심으로 무예를 연마했으며 그 후 춘천에 거주했을 수도 있을 것임( 보통의 경우 시신은 고향 또는 거주지에 모시는 경우가 많음) 평산에 궁위전 300결과 성을 받음.

 

★유협(한량, 건달)인 능산을 궁예가 발탁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것은 잘 못된 것이고 말을 타고 맸다는 계마석도 있고 능산, 능길(아우)의 "능"자를 이름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아 호족출신임을 알 수 있음( 고려조에 '능'자 이름이 19명이었는데 모두 호족이고 백제의 수달장군도 '능창'이 었음)

 

 

★견훤은 단순히 후백제 건설을 표방했으나 궁예는 태봉국이라 하여 이상세계를 표방하였으므로 견훤을 따르지 않고 대의에 입각하여 궁예를 따름. 후에 폭정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하므로 궁예를 버리고 왕건휘하로 들어감.

 

★ 927년 대구 팔공산 전투에서 위급한 왕건을 구하기 위하여 곤룡포를 대신 입고 지략을 다하여 용맹히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몸에 꽂히는 화살을 뽑고 또 뽑으면서 전쟁을 오래 끌어 왕건으로 하여금 탈출할 기회를 만들어 줌. 왕건은 근위병 몇 명만을 대동하고 한숨을 쉬며 장절공이 마련해준 시간을 이용하여 전지를 가까스로 빠져나와 후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룸.왕건이 휘하여 불과 몇 사람만을 데리고 도망치면서 한숨을 쉬었다는 '한숨바위'가 동수지역에 있음.

 

★장절공의 위왕대사 평가: 우리 역사에 처음 있는 유일한 일. 당시는 민주국가가 아니므로 왕을 통해서만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음. 따라서 단순히 왕을 위해서 죽었다기 보다는 백성을 위해서 한몸을 던짐. 후백제 건성을 표방한 견훤이나 후에 포악한 궁예를 버린 것도 백성을 위한다는 정신에서 이루어짐.고려 건국의 일등공신(3000명이나 되는 공신가운데 일등공신은 4명은 4명=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복지겸)이었음에도 벼슬을 마군장군 이상 나아가지 않았고 그 흔한 왕건과의 혼인도 없었음.

 

★신숭겸은 고려조부터 조선후기까지 가장 본보기가 되는 충신으로 고려 예종 때 팔관회(전몰장병 위령제)에서 신숭겸장군의 가상을 만들어 춤을 즐김=도이장가와 이두로 된 노래도 전해 옴)

 

조선조에서도 파주에 숭의전을 지어 왕건 다음으로 신숭겸, 서희, 강감찬, 김취려, 정몽주 순으로 모심.

 

북한: 광개토대왕과 왕건 연구가 활발하며 왕건릉에 무인으로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대광현(귀화인) 순으로 모시고 오른편에는 문인을 모심.

 

 

 

 

漢城尹公神道碑銘

旅後孫 刑曺判書 應朝 撰

  함흥부의 덕음암에 계좌정향의 묘가 있으니 곧 漢城尹 申公의 묘지이다.公의 18세손 명균(命均)과 20세손 양식(暘湜)이 말하기를 公의 장지(葬地)가 오백여년이 지났는데 중간에 전란으로 인하여 실전(失傳)한지 이미 오래이던바 순조 을해년(서기 1815년) 公의 후손 聖達, 志輪, 光連등이 종친과 함께 상의하여 수년간 탐구한 결과 거친언덕 길못가운데에서 단비(斷碑)를 발견 작은 비석을 대조한 즉 사실과 틀림없었다.

 

  이로써 公의 묘소를 확인하게 되었는데 그 단비(斷碑)에 판서 신공하지묘(判書 申公夏之墓)라 대서각판(大書刻板) 하였고 뒷면은 이미 글자가 깍기어 잘보이지 않으나 생존년수와 벼슬과 사직과 끝이 모두 보첩(譜牒)에 기재된대로이나 今漢城尹으로 되었는 것이 혹 前고구려조에 판서이었다가 李朝에서 漢城尹이 된것이 아닌가로 여겨지며 여조판도전(麗朝版圖典)이 상판서와 이조 한성윤은 품급으로는 같으나 公이 이조에는 유임하지 않고 칭호만 있었던 것이 아닌가 宗中의 석우씨는 공이 어사대부의 자손이라고 하였다.

 

고려말에 이조에서 귀양갔으니 지금의 함흥부이다. 자손들이 선조를 따라 함흥사람이 되었고 당시 어진사람들과 사대부가 곤욕을 당한 사실에 비추어 公도 그중의 한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그러나 그분의 사적(事積)과 행실이 대대로 전하지 못하였는데 公과 교분이 있었던 상서관(尙書官)의 고찰(考察)에 따르면 公이 함흥에 있을때 이곳 인심과 풍속이 경박하여 公의 문장적 교훈과 도덕적 지도를 따를 줄 모른다고 전하였을 뿐이니 공의 유적(遺跡)이 한두가지 밖에 남아있지 않음이 아쉽다.

 

자손들의 작은 정성으로 선행 치적(治績)을 신도비에 전각하여 후세에 전하는바 公이 가신지 너무 오래되어 그 상세한 사실을 밝힐수가 없어 자손의 물명불찰(不明不察)로 그 죄가 너무크다.더욱이 公이 귀양가 있을 때 그곳의 풍속이 까다롭고 정사가 흐트러져 公의 지조(志操)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인심(人心)을 순화하고 풍습을 막거나 억제하지 않고 훈도(訓導)한 공(功)은 실로 公의 덕행이 아니었을까.

 

 公의 절개와 덕업이 이와같을 진데 천지자연과 선인과 함께 원대할 것이며 세인을 밝게 지도하여 선행으로 나가게 하였으니 公의 후손들이 그 덕음(德蔭)을 받다 번성(繁盛)할 것은 천리(天理)인 것이다.

 

 公은 조부 어사공(御史公)의 청백직절(靑白直節)로 사유선생의 높은 절개와 탁월한 실행과 곧은 길로써 문장과 삼강오륜을 밝힌데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公의 휘는 夏요 성은 신씨요 평산인이다.  고려태사 장절공휘 숭겸의 후손이다. 4男2女를 두었다.

 

公의 자손이 이곳저곳에 산거(散居)하고 있으나 이북에 거주한 자손이 더욱 많다고 한다.비석에 새기되 위대한 태사여 신씨의 조상이로다. 강직한 어사여 그 용맹을 이었도다. 저 漢城尹은 어사(御史)의 자손이로다.좋은 풍채와 높은 기질은 나라의 인물이라하겠다. 누가 내가 가는 산수(山水)에 성(盛)한 경치도 좋을시고 인심은 우매하나 지극한 정성으로 인도하자 강한 구부러진 나무는 정성을 다하여 펴져야 한다.

 

모든사람들이 사랑스런 백성으로 기르리로다.公이 왔다불으짖으며 지성으로 따르리라 슲으다 세상사여!역사에 빠짐이 많도다 나라에서나 가정에서나 소문이 자자하였다. 저 사척묘지가 그 자리를 실전(失傳)하였다.황무(荒蕪)한 언덕의 일편비각(一片碑角)을 천우신조(天佑神助)하여 얻게 되었다. 보다 넓히고 보다 대축(大築)하여 옛모습을 복구하니 公의 덕이요 보답이라 밝은 하늘의 은덕이로다.

 

덕행이 흘러 경사계속(慶事繼續)하니 그 자손딜이 길이 천만세로다. 육척(六尺) 고석(高石) 대서 공적(功績)이로다.가까운  천년에 이뜻 깊으리.

 

高宗十年癸酉孟秋壯節公二十七世孫資憲大夫 前任刑曹判書知  經筵事同知春秋館成均館事 弘文館提學應朝는 삼가 撰함(고종십년계유맹추장절공이십칠세손자헌대부 전임형조판서지 경연사동지 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제학응조는 삼가 찬함)
[정리:平山申氏 光州, 全南花樹會長 申 鉉 年]